소cattle들은 ‘캐틀 팟’cattle pot이라고 불리는 구멍 뚫린 은색 철제 트레일러에 실려 왔다. 캐틀 팟에 난 구멍은 바람과 공기가 안으로 들여보내고 소들이 내뿜는 뜨거운 입김과 배설물을 배출하는 용도였다. 캐틀팟 내부는 볼 수 없었다. 운전사가 급하게 하역 작업을 마치고 떠났기 때문이다. 이 작업은 매번 아주 빠르게 진행됐다(이후에 레프티에게 고기에 멍이 든 이유가 무엇인지 물어본 적이 있는데 그는 “그 운전사들이 어떻게 하는지 못 봤어?” 하고 반문했다.) 트럭은 네브래스카주 서부나 아이오와주 등의 여러 축사에서 온다. 이층 구조인 표준형 캐틀 팟 한 대에 겨우 40마리가 들어가는데, 이곳 도축장에서 도축되는 소는 매일 5100마리나 된다. 그래서 매일 아침 오전 6시가 조금 지나면 도축 라인이 가동되기 전부터 트럭들이 쉴 새 없이 몰려들어 소를 토해내고 간다.
먼저 소의 무게를 잰다. 그런고 다음 도축장 입구 앞에 있는 야외 우리로 소들을 안내한다. 수의사는 다른 작업자들이 일을 시작하기 전 소들을 살핀다. 상처나 장애, 질병 징후가 있는지 살피는 것이다. 검사가 끝나면 작업자들은 소들을 경사로를 따라 올라가도록 해 도축장 건물 안으로 들여보낸다. 지붕이 달린 경사로는 완만하게 꺾여 있었다. 가축 전문가 템플 그랜딘이 설계한 곳으로, 완만하게 꺾인 길과 어둑한 조명은 최후의 순간을 맞게 될 동물이 진정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돕는다. 하지만 진정 효과를 주는 것은 딱 여기까지다.
“Huele mal, no?” 소를 몰던 한 멕시코인이 물었다. “냄새 고약하지?” 그는 지독한 소변 냄새를 맡지 않으려고 코를 막으며 우리에게 말했다. 나는 캐롤리나와 이 맥시코인이 일하는 축사를 둘러보고 있었다. 미 농무부의 신입 육류 검사관인 우리는 도축 작업을 살펴볼 예정이었다. 이 멕시코인 작업자는 동료들과 함께 소들을 경사로로 옮겨 놓으려고 막대기를 휘두르며 소의 머리에 묶어놓은 하얀 비닐봉지를 흔들었다. 비닐봉지는 소들이 겁을 먹고 움직이게 만들기 위한 것이다. 겁 없는 소에 대해서는 회사 규정에 어긋나지만 전기 충격기를 사용했다. 소의 생식기나 배꼽 부위에 전기 충격을 주면 탁탁하고 소리가 났다. 이 경사로에서는 정말 고약한 냄새가 났다. “그렇네요.” 나는 스페인어로 말했다. “왜 이렇게 냄새가 심한 거죠?”
“무서운 거지. 이 녀석들은 죽고 싶지 않은 거야.” 그 직원이 말했다. 사실 녀석들이 이곳에 온 것은 죽기 위해서다. 이 경사로를 지나기만 하면 얼마 남지 않았다.
-The Way of All Flesh, By Ted Conover, May 2013, Harper’s Magazine
🐘
-미국의 기자이자 교수인 테드 코노버는 교도관으로 위장 취업해 감옥 내부를 취재하거나 멕시코 이민자들과 함께 국경을 넘는 등 직접 현장에 뛰어들어 경험하고 관찰한 내용을 내러티브 논픽션(책이나 기사)으로 써왔다. 그런 그의 취재방식 때문에 ‘몰입 취재의 대가’라고 불린다.
-오늘 소개한 기사는 그가 미국 농무부의 육류 검사관으로 취업해 한 도축장을 견학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그는 직접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아주 생생하고 풍부하게 묘사하는 데 선수다.
- 그의 글을 읽으면 독자들도 그 현장에 함께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가 현장에서 바로 들려주는 것 같은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다. 아래 기사 중반부에 등장하는 대목을 보면 더욱 그렇다.
✏️
휴게실을 나와 짧은 복도를 걷고 다시 계단을 좀 올랐다. 철제문 한 쌍을 열고 지나가면 도축장the kill floor이 나온다. 이곳은 인간과 기계가 뒤엉켜 활동하는 곳으로, 아마 재주 많은 엔지니어가 좋은 뜻에서 만들었을 지옥 같은 원형의 구조를 갖췄다. 감독관 허브가 무언가 말 한 듯했지만, 실내가 너무 시끄러워 한 마디도 알아 듣지 못했다. 나는 내가 보고 있는 게 무엇인지도 정확히 파악이 안 됐다. 도축장이라고 부르지만 이곳은 사실 축구장만 한 크기의 거대한 방이다. 작업자들은 거대한 체인에 매달린 채 이동하는 조각난 소를 바라보고 섰다. 세 명의 작업자는 전기톱이 장착된 유압식 장비에 앉아 매달려 오는 소의 척추를 따라 반으로 자르는 일을 했다.
죽은 소를 운반하고 있는 체인을 보면서 조금씩 이해가 됐다. 체인은 동쪽 벽, 그러니까 소가 외부에서 처음 들어오는 곳에서 시작됐다. 이 동쪽 벽 너머는 도축장에서 외부에 노출되지 않도록 칸막이에 가려진 유일한 공간이었다. 허브는 우리를 데리고 철제 통행로 위를 지나 딱 봐도 무거운 문을 통과했다. 거기서 난간을 붙잡고 우리는 도축 현장을 내려다봤다.
동쪽 벽으로 난 작은 출입구에서 소들이 한 마리씩 들어와 좁고 약간 경사가 진 활송장치에 올라간다. 이 활송장치 앞에 노커knocker라고 불리는 직원들이 서 있었다. 이들 앞에는 양쪽에 손잡이가 달린 물건이 케이블이 달려있는데 바로 도축용 총a captive-bolt gun이다. 이 총을 소의 이마에 대고 방아쇠를 당기 게 노커의 역할이다. 대체로 소들은 즉시 앞으로 고꾸라지면서 이마에 동그랗게 뚫린 구멍에서 피가 쏟아진다. 만약 한 방에 쓰러지지 않으면 노커는 다시 한번 총을 쏜다.
이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활송장치 밑에 있던 작업자는 안면 마스크와 충격 방지 패드가 달린 헬멧을 쓰고 소의 왼쪽 뒷다리에 커프cuff를 채운다. 소가 쓰러지면 체인이 커프에 묶인 다리를 끌어올려 소 한 마리를 통째로 공중으로 이동시킨다. 소의 사체는 이제 곳곳으로 이동한다.
캐롤리나와 나는 한동안 말없이 이 장면을 지켜봤다. 노커는 천천히 움직였고, 소의 이마 위 적절한 위치에 총이 닿을 때까지 인내심을 갖고 기다렸다. 이 작업은 보통 한 번에 이뤄지지 않는데, 소가 몸을 숙이거나 활송장치 주위를 둘러보느라 머리를 움직이기 때문이다. 노커는 소가 움직이지 못 하게 활송장치의 폭을 조절다. 소 한 마리는 , 다른 소와 달리, 노커의 총을 향해 킁킁거리며 고개를 쳐들었다. 이게 뭐지? 이 소가 마지막으로 떠올렸을 생각이다. 노커는 소가 축축하게 젖은 코를 내리길 기다렸다. 그리고 총을 아래로 향했고 쿵 소리가 났다. 쓰러진 소들이 차례차례 매달려 옮겨지기를 기다렸다. 스키 리프트에 달린 곤돌라가 떠올랐다. 때론 소들이 산발적으로 격렬하게 발길질했다. “아직 죽지 않았나 봐요.” 캐롤라이나가 말했다. 캐롤라이나는 내 바로 옆에 있었고, 이곳은 다른 곳보다는 시끄럽지 않아 그녀의 말소리가 잘 들렸다. 소의 목을 잘라 낸 후에도 심장 박동 계속됐고, 몸 속의 피를 모두 빼내는 데 도움이 됐다. 그 상태로 체인에 매달린 채 한 두 바퀴 돌면, 소의 발길질도 곧 멈춘다.
-The Way of All Flesh, By Ted Conover, May 2013, Harper’s Magazine
🐘
-이런 장면 묘사를 보면 저자의 목소리가 매우 두드러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글의 ‘화자’가 기자 자신임을 그는 숨기지 않는다. 그의 기사 곳곳에 저자 자신을 가리키는 I, Me(혹은 복수형 We, Us)가 등장한다.
-이렇게 자신을 등장시키는 방식은 기자들에게 가장 피해야할 것으로 꼽힌다. 객관적이지 않은 글, 즉 주관이 담긴 글이라는 것이다.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기자의 주관은 물론 존재 자체도 지우기를 요구받는 것이다.
-그래서 테드 코노버의 기사와 책은 종종 저널리즘과 회고록을 오간다고 평가받는다. 사회학이나 인류학 연구에도 비교된다. 그의 글을 두고 이런저런 논쟁이 있는 듯 하지만, 그는 여전히 뛰어난 기자이자 저널리즘스쿨 교수로 인정받는다.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1인칭 시점으로 글을 쓰지만, 매우 중요한 사안을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작법을 고수해왔다. 그의 기사가 보통 ‘체험기’라 불리는 수많은 글과 다른 점도 여기에 있다. 그는 많은 이들이 알아야 할 공적인 영역을 다루고, 직접 현장을 관찰하고 체험하는 것이 잠입 취재 형식을 빌리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곳을 찾아는 게 특징이다.
-또 중요한 것은 1인칭 시점으로 글을 쓰지만, 개인의 감상을 쓰는 게 아니라 직접 관찰한 취재 대상을 세밀하게 묘사한다는 점이다. 감상문이 아니라 기사이기 때문이다. 직접 관찰과 경험이라는 취재 방식을 최대한 활용했기 때문에 그의 1인칭 서술 방식이 저널리즘의 영역에서 인정받는 것이다.
-1인칭 시점의 글이 모두 테드 코너버의 글과 같지는 않다. 1인칭 시점이 곧 ‘내러티브 저널리즘’이라고 잘못 인식되면 취재 대상으로 ‘빙의’해 쓰는 기사 아닌 기사가 탄생하기도 한다. 자칫하면 개인의 감상을 나열한 체험기가 될 수도 있다.
-아래에 소개할 글을 뛰어난 내러티브 스토리텔링 기사들을 다루는 미국의 월간지 ‘디 애틀랜틱’에 실린 알렉스 티존 기자의 글이다. 티존은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집에서 돈 한 푼 받지 않고 ‘노예’처럼 일한 여성에 대한 일화를 쓰고 있다.
✏️
유골은 토스터기 크기의 검은색 플라스틱 상자를 가득 찼다. 무게는 채웠습니다. 무게는 1.5킬로그램 정도였다. 나는 천으로 된 토트백에 이 상자를 넣고 다시 여행용 캐리어에 넣었다. 지난 7월 나는 태평양을 건너 비행기를 타고 마닐라로 향했다. 나는 자동차를 빌려 한 시골 마을로 갔다. 그 마을에 도착하면, 56년 동안 우리 가족의 노예로 살았던 여성의 모든 것을 떠나보내게 된다.
그녀의 이름은 유도시아 토마스 풀리도. 우리 가족은 그녀를 로라라고 불렀다. 로라는 149센티미터에, 진한 갈색 피부와 큰 눈망울을 갖고 있었다. 그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모습이 나의 ‘첫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녀가 열여덟 살 때 나의 할아버지는 그녀를 나의 어머니에게 선물로 주었다. 그리고 우리 가족이 미국으로 이민 왔을 때도 그녀를 데리고 왔다. 노예라는 단어 외에 그녀의 삶을 아우를 수 있는 단어는 없을 것이다. 그녀의 하루는 우리 가족 모두가 일어나기 전 시작해 잠이 들면 끝난다. 우리 가족의 세 끼 식사를 준비했고, 청소도 했으며 우리 부모님이 집에 오기를 기다리며 나를 포함한 형제자매 5명을 돌봤다. 우리 부모님은 그녀에게 급여 한 번 준 적 없이 계속 꾸짖었다. 그녀는 철창에 갇혀 지내지는 않았지만, 그것과 별다르지 않은 생활이었다. 밤 중에 화장실을 갈 때면 구석에서 빨랫감 위에 쓰러지듯 기대어 잠든 그녀를 본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녀의 손은 개고 있던 움을 움켜쥐고 있었다.
이웃들에게 우리 가족은 모범적인 이민지이자 모범적인 가족이었다. 모두들 그렇게 말했다. 아버지는 법학 학위가 있었고, 어머니는 의사가 되기 위해 공부하고 있었다. 내 형제들과 나는 학교에서 좋은 점수를 받았고 언제나 존댓말(please)과 감사 인사를 잊지 않았다. 우리는 한 번도 로라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이것은 우리의 비밀이었다. 비밀은 우리가 누구인지를 말해주는 핵심 요소였고, 적어도 우리 형제들에게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핵심 지표였다.
1999년 어머니가 백혈병으로 돌아가신 뒤, 로라는 나와 함께 살기 위해 노스 시애틀로 왔다. 나는 좋은 가족, 좋은 직업이 있었고, 교외에 좋은 집을 가졌다.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셈이다. 그리고 내게는 노예가 있었다.
-My Family’s Slave, By Alex Tizon, The Atlantic, June 2017
🐘
-자신의 경험담을 1인칭으로 썼지만 테드 코노버의 글과 알렉스 티존의 글 중 무엇을 저널리즘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답하는 것은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다. 티존의 글은 감동적인 자신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지만, 너무나 개인적인 일화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시점으로 글을 썼는지가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 다루었는지라는 것이다.